한경직

test

마포삼열 선교사

미국 인디애나 주 매디슨에서 태어난 마펫선교사는 1884
년에하노빌대학을 졸업하고, 1889년에 매코믹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한국 선교를 자원하여 1890년에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그는 1893년까지 서울에서 활동하고, 1893년 이후에는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1901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에 취임해서 근대교육에 힘썼다. 또 1918년부터 1928년까지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평안도에 많은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였다.

1912년에 ‘105인 사건’으로 한국의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자,
윤산온(G.S.McCune), 에비슨(O.R.Avison) 등과 함께 이 사건이
사실무근의 날조사건이며 고문 등 비인도적 방법이 자행되고 있
다고 그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항의했다.
그리고 미국 장로회 본부에 일제의 만행을 보고해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일제의 암살 압력을 받자 서둘러 미국으로 피신한 이후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다가 일제의 강압통치가 심해지면서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1939년 10월 24일 임종을 맞았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한국에 묻어달라’
는 유언을 남겼고, 이에 따라 60여년
만인 2006년에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을
지낸 장신대 교정에 이장되었다.

한경직과 마포삼열

1895년 원산에서 평양으로 가던 마포삼열과 한석진은 길을 잘못 들어
간리라는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마포삼열은 처음 보는
서양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몰려든 마을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로써 간리 마을에 처음으로 복음의 씨앗이 심어졌고 후에 마을
청년들이 평양을 다녀온 뒤 마을 동쪽 언덕의 돌배나무 밑에 자작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그로부터 7년 후 한경직은 간리마을에서 태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마포삼열이 세운 자작교회를 다녔고 교회 마당에서
놀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한문 서당대신 교회가 세운
진광소학교에 다니며 신학문을 배웠다. 마포삼열은 한경직이 일찍이
기독교 신앙과 신학문을 접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 것이다.

“해방 이후 나는 마포삼열박사기념위원회 위원장이란 직함을 얻은 적이 있다.
내가 그런 직함을 마다않은 것은 마 목사는 실로 위대한 신앙가요,
신학자요, 교역자요, 교회 정치가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 분의 경륜으로
평양의 모든 교회와 평안남북도 일대와 황해도까지 교회가 발전하였다는 말도 있다.
” -「나의 감사」

한경직은 마포삼열박사기념위원회의 위원장을 지낸 적이
있고, 후에 마펫선교사의 후손들과도 매우 가깝게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