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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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호열

군목으로 고아 구제와
포로전도에 공헌

옥호열은 한경직이 프린스턴신학교 재학 시절 같은 반에서
공부하던 친구이다. 그는 휴런대학과 무디성경학교를
졸업하고 프린스턴신학교에 입학했으며 한경직보다
대여섯 살 더 많았다. 학창시절부터 한국에 선교사로
오려는 소명감이 강했던 그는 한국 학생인 송창근과
같은 방을 썼다. 그가 선교사로서 한국에 오게 된 데는
한국 초대 선교사 가운데 한 분인 소안론 (W. L. Swallen)
박사의 딸 걸추르드(Gertrude Swallen)의 영향이 컸다.
두 사람은 졸업과 동시에 결혼해 한국에 와서 40년간 안동과
서울에서 선교사업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옥호열은 1.4후퇴시에 끈질긴 교섭끝에 북한에 산재해 있던
교인 3천명을 원산에서 배를 태워 남하하게 한 일은 참으로
놀라운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옥선교사 아니고는 아무도 해낼
수 없는 큰 일이었다고 한목사는 감격어린 어조로 회고한바
있다. 한국전쟁 때 미군 군목으로 지내면서 많은 피난민과
고아들을 도와주었고, 포로수용소를 돌아다니며 전도해 나중에
석방된 포로 중 200여 명이 목회의 길을 결단하기도 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려는 이들을 위해 미국 여러 교회에 호소해 학비를
마련했고 그렇게 공부해서 목사가 된 사람이 150여 명에 이르렀다.

그는 평양 숭실대학이 서울에 재건될 때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였고,
학교 시설이나 운영 면에 적극 지원하였다. 오늘날 숭실대학교를
이룩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으며 숭실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본국에서 보조금을 많이 받아 대학을 크게 확장시켰다. 한경직은 숭실대학
학장으로 있으면서 옥호열을 교수로 초빙했고, 그는 영락교회 협동 선교사로
있으면서 교회를 도왔다. 한경직과 옥호열은 평생 동안 친구로서 함께
일했고 은퇴 후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만남을 이어가곤 했다.

권세열

한경직이 프린스턴신학교를 다니던 시절, 학교에는
구내식당이 없어서 250여 명의 학생들이 60~70명
단위로 자치 클럽을 형성해 학교에서 가까운 가정집에
서 식사를 해결했다. 당시 클럽은 식사나 사교의 중심이
되었다. 한경직의 한 해 선배였던 권세열은 같은 클럽
멤버로서 서로 친하게 지냈다. 권세열은 신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에 나와 숭실대학에서 가르쳤다. 그는 선교사들
중에서 한국말을 가장 잘하기로 유명했고 한국 사람들과
친밀하게 사귀며 한국 교회를 위하여 평생을 바쳤다.

그가 한국에 끼친 가장 큰 공헌은 ‘성경구락부’ 사업이다.
성경구락부란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교육운동이다.
교회가 정규학교에 가기 어려운 가난한 학생들을 모아 놓고
성경도 가르치고 다른 과목도 가르친 무인가 초등학교라고
할 수 있다. 교회 안에 잘 믿는 청년 남녀를 성경구락부 교사로
택했는데 미국 선교부에서 이 구락부를 전적으로 운영하면서
교사들의 월급까지 지불했다. 교사는 남편과 일찍 사별한 미망인이
대부분이었다. 성경구락부 사업은 가난한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뿐
아니라 외로운 미망인을 돕는 사업이었다

6.25 이후 전쟁고아들을 비롯해 가난한
아이들이 많아지자 고등부를 두어 중학
과목까지 가르쳤다. 성경구락부가 발전하여
완전한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가 된 곳도 많았고
이 사업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감으로써 한국이
발전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