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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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사상

애국 사상

오산학교에서의 애국정신 고취

한경직은 민족지도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강한 나라사랑 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일제하에서 가장 민족주의 교육을 강하게 시켰던 오산학교에 진학해 학교를 설립한 남강 이승훈과 그 당시 교장이었던 고당 조만식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그 당시 대표적인 애국지사들로 나라를 되찾는 일이 청년들의 사명임을 역설하며 애국사상을 고취시켰고, 나라를 되찾고 민족을 부흥시키기 위해서 현대 학문을 배워야 함을 강조했으며, 사람이 바로 되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한경직은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반일사상과 함께 강한 애국정신을 가슴속에 품게 되었다.

기독교 정신에 기반한 반공의식

한경직은 일제강점기를 통해 자유로운 나라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고 공산주의를 경계했다.

1902년에 태어난 한경직은 어린 시절인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의해 나라를 잃었고 일제시대를 거치며 일제의 만행을 경험했다.
그는 영성소학교 시절, 독립단이 평양경찰서를 폭탄으로 투척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용의자로 지목받아 고문을 당했고 일제에 의해 학교와 교회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소련군과 공산당의 폭력과 억압을 목도했고, 월남 이후 한국전쟁을 몸으로 직접 체험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한경직은 나라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깊이 깨달았고 제국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경험을 통해 한경직은 인간의 삶과 사회와 국가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얻게 되었고 기존의 삶의 방식이나 사회체제와 제도, 국가 이데올로기 등의 한계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한계를 넘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기독교로 보았다.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나라사랑 실천정신

한경직은 사랑을 핵심가치로 삼고 있는 새로운 정신인 기독교 신앙이 깊어지면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처럼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게 되고, 회개와 중생을 통해 새로운 사람이 되어 결국 새로운 나라,건강한 나라를 만들게 된다고 보았다.

그는 기독교야말로 유물론적 인간관을 가진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자유 민주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여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대우하고 자유를 존중하는 가치체계를 갖고 있다.
또한 기독교는 하나님을 모든 인간의 아버지로 믿으며 서로 사랑하며 화평을 이루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한경직은 민주국가의 정신적 기초를 기독교 신앙으로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경직에게 기독교 신앙과 애국활동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고, 예수 사랑을 바탕으로 한 나라 사랑의 실천에 열심을 냈다.
또한 우리나라 곳곳에 기독교 신앙을 전하고 전 국민을 복음화 함으로써 보다 나은 자유 민주국가, 새로운 나라를 세워가기 위해 힘썼다.

애국 활동

애국 활동

신의주 애국교육

한경직의 첫 목회지였던 신의주 제2교회는 신의주에서 청년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교회였다.
그는 청년들에게 기독교 신앙뿐만 아니라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심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구체적인 애국의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일념 아래 한경직은 설교와 강연을 통해 교회 안팎의 청년들을 계몽시키고 애국교육을 실시했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신의주 청년들은 유물론을 내세워 폭력으로 억압하는 공산주의에 반대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1945년 11월에 일어나 반소(反蘇), 반공(反共)을 외친 신의주학생반공의거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공산치하에서 격렬하게 저항했던 사회운동이 아주 드물었던 상황에서 일어난 신의주학생반공의거는 이후 평양, 함흥 등 북한 지역의 반공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의주자치위원회 조직과 활동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사회상황은 치안 유지의 공백상태로 인해 매우 어수선했다.
패망한 일본은 그때까지 무장해제를 하지 않았고 그들을 증오하는 한국 사람들과 곳곳에서 충돌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인 평안북도 도지사가 한경직을 찾아와서 미군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치안을 잘 관리해서 사회가 혼란하지 않도록 해줄 것을 부탁했다.
한경직은 곧바로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유필을 위원장으로 세우고 ‘신의주자치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그와 윤하영은 부위원장으로 실무를 맡았다.
자치회 조직은 제일 먼저 도지사로부터 경찰권을 인수받았고 보안부를 신설했다.
그 결과 그 당시 신의주 내에서는 사건사고가 한 건도 없었고 일본 사람을 상대로 원수를 갚거나 행패를 부리는 사람도 없었다.

기독교사회민주당 활동

38선이 생기면서 소련군과 공산당은 북한 주민들에게 폭력과 억압을 행사했고 ‘신의주자치위원회’를 자신들의 권력 아래 두려고 했다.
이에 따라 공산당에 맞서는 조직의 필요성을 느낀 한경직은 평북의 기독교인들을 기반으로 한국 최초의 정당인 기독교사회민주당을 1945년 9월초에 세웠다.
기독교사회민주당은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과 기독교 정신에 의한 사회개량’을 정강으로 삼았고 신의주뿐 아니라 평양과 서울까지 세력을 규합할 것이라는 큰 그림도 그려두었다.
기독교사회민주당은 지방에 조직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 추종자들과 자주 충돌했다.
11월 16일부터 있었던 용암포지부 결성대회를 계기로 일어난 충돌은 11월 23일부터 시작된 신의주학생반공의거의 도화선이 되었다.

대한기독교구국회 활동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한경직은 여러 목사들과 함께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해 1950년 7월 3일 대전에서 ‘대한기독교구국회’를 조직하여 국방부와 사회부를 도와 선무·구호·방송 등의 활동을 했다.
비록 전의를 상실하고 쫓겨 가는 상황이었지만 시국강연회를 열어 반공사상을 불러일으키고 단결을 호소하며 사기를 북돋았다.
이 모임은 순식간에 이남 전역으로 퍼져 대구, 부산 등 30여 곳에 지부가 설립되는 호응을 일으켰다.
그리고 교회들을 통해 3,000명의 기독청년들을 모집해 ‘기독청년의용병’을 조직하여 훈련을 시키고 낙동강 전투에 투입하기도 하였다.

민간 외교 활동

1951년 3월 한국 정부는 UN군의 한국 파견과 원조에 감사하여 한경직을 UN에 감사 사절단으로 파견했다.
이는 한경직이 영어에 능통하고, 한국에 우호적인 많은 미국 친구들과 유지들을 알고 있으며, 미국 교회지도자들과 폭넓은 교제를 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1년 군사혁명 이후에 미국 정부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군사 쿠테타에 대해 한국 사회지도자들의 의견을 듣고자 했다.

이러한 미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한국 정부는 한경직과 김활란 등을 사절단으로 파견해 한국의 상황을 전달하도록 했다.
훗날 증언에 의하면 한경직은 일부 사절단 활동에 대해 회의를 가지긴 했으나 나라가 공산당에 넘어가는 것을 염려하여 협력하였다고 하였다.

한경직은 나라를 사랑하는 구국일념으로 UN과 미국 정부, 정치계를 비롯한 교계에서 동분서주하며 많은 외교적 공헌을 했다.

군복음화 운동

한경직은 1948년부터 휴가병들을 대상으로 기독교 복음을 전했고 1950년 한국전쟁 중에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해 군목제도를 도입시켰다.
그는 1953년에 철원 백마고지를 방문해 군인들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고 월남전이 한창이었던 1966년에는 2주 동안 파월장병들을 방문해 위문하기도 했다

한경직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군복음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는데 이는 전도의 목적뿐만 아니라 국가 안보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국가적 차원에서 안보문제를 생각할 때 국민 개개인의 정신적 자세, 가치관, 애국심, 협동 정신, 희생 정신 등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국민의 정신과 품격은 기독교 신앙과 직결된다고 보았다.
즉 유물론 공산주의와 대치한 한국의 현실에서 유신론인 기독교 신앙이야말로 군의 정신 전력에 크게 기여한다고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