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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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사상

신행일치의 목회

한경직은 자신이 선포한 말씀대로 실천하는 신행일치 목회자였다.

그는 1995년 [가이드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태어난 해가 1902년이니 올해 내 나이가 94가 된다. 이렇듯 긴 인생여정 동안 많은 것을 배우며 여러 상황에 처하면서도 나는 늘 ‘신행일치’의 삶을 살고자 노력해 왔다. 우리가 어떤 일에 종사하든 간에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신행일치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한경직을 존경할 만한 목사, 감동을 주는 목사, 누구에게나 귀감이 되는 목사로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에게 정직하고 철저한 목회

한경직은 목회자가 실패하는 궁극적인 원인은 자신을 삼가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삼가는 것은 생각을 잘 지키고, 말에 실수가 없도록 주의하고, 행동 특히 물질적인 유혹에 주의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목회자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구원의 확신, 분명한 소명의식, 신령한 눈으로 미래를 조망할 수 있는 비전, 지적·도덕적·영적 성장과 성령의 충만이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한경직은 이러한 덕목을 스스로에게 적용하기 위해 애썼다.

사람과 관계를 중요시한 목회

한경직이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는 데는 그의 뛰어난 인격, 감동스러운 설교뿐 아니라 주변에 충성된 일꾼들이 함께했다.

이는 한경직이 사람 중심, 관계 중심의 목회를 한 증거이다. 그는 사람과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누구보다 겸손과 중용의 자세를 가졌다. 많이들이 한경직을 겸손의 사람, 화합과 화해의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에게 있어서 겸손은 신앙의 덕목이었고, 목회를 위한 결단이었다. 그리고 그는 목회를 하면서 어떤 일을 추진할 때 무조건 강행하기보다는 교회의 화평을 위해서라면 포기하거나 중단하기도 했다.

원칙과 신학이 있는 목회

한경직은 교회를 이끌어 가면서 3대 목표와 4대 신앙지도원칙을 설정했다. 이는 한경직의 목회활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3대 목표는 전도,교육,봉사를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말이지만 전도사업을 올바르게 하려면 저는 세 가지 방면을 늘 생각해야 할 줄로 압니다.
첫째는 예수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예수는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 계신지 아니 계신지 분명치 아니한 이들에게 하나님이 분명히 계신다는 것을 설교를 통해서, 개인과의 접촉을 통해서 전도를 하지요. 그러나 또 다른 방면을 생각할 것이 전도사업은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잘 믿는 사람이 함께 모여서 같이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으니까 이 아이들이 커서 나라에 봉사하고, 세계에 봉사할 수 있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육사업을 등한히 할 수 없습니다.
그 외에도 다른 한 가지 방면이 더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언제나 불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는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까닭에 낙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회의 낙오자와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을 우리는 돌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봉사의 뜻을 언제나 둬야 합니다.
” SBS 대담 프로그램 '나의 삶 나의 길‘- 사랑과 봉사의 사도 한경직 편, 1993년 방송

4대 신앙지도원칙은 경건한 복음주의 신앙의 육성, 성서적 생활윤리의 훈련, 교회연합정신의 구현, 세상에서 하나님 공의의 실현을 말한다.

첫째로 복음주의 신앙은 성경 중심, 그리스도 중심, 십자가와 부활 중심의 신앙 을 의미한다.


둘째로 성서적 생활윤리는 청교도적인 생활로서 온전히 거듭난 생활, 곧 성결한 생활, 성실한 생활, 근면하는 생활, 절제하는 생활, 사랑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셋째로 교회연합정신 곧 에큐메니칼 정신은 협력, 협동, 동참, 참여의 정신을 의미한다. 교파를 초월해서 온 교회가 국가, 민족, 사회를 위한 봉사나 복음전파에 있어서 서로 앞장서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로 세상에서 하나님 공의의 실현은 올바른 사회봉사와 사회참여를 말한다. 이는 교회가 의료사업, 사회복지사업, 교육사업, 문화사업에 깊은 관심을 갖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살 만한 사회와 국가를 이룩하도록 힘써야 함을 의미한다.

목회활동

신의주 제2교회 목회

한경직은 신의주 제2교회 김기범 장로의 청빙을 받았다. 매우 연약한 교회이지만 장래성 있는 청년들이 많아 희망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그는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약한 교회야말로 자신이 가야 할 교회라는 결단으로 신의주 제2교회를 첫 목회 사역지로 택했다.

한경직은 특별히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구체적인 애국의 길을 제시해 주기 위해 신앙교육과 함께 다양한 애국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는 처음에 전도사로 교회를 이끌다가 1년 후에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심혈을 기울여 목회에 전념했다. 신의주 제2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청년들이 모여들기 시작해서 얼마되지 않아 예배 참석 인원이 3천 명에 이르렀고 전 교인들이 힘을 합쳐 2년 만에 예배당을 건축했다. 또한 그는 신의주 일대 뜻있는 이들과 힘을 합쳐 고아들을 위한 보린원과 양로원을 세웠다.

당시 일제는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신사참배를 반대한 한경직과 교회 장로들은 20여 일간 신의주경찰서에 갇혔다. 유치장에서 나와 보니 일본 경찰이 교회에 남아 있던 제직들을 모아놓고 신사참배에 동의하도록 가결시킨 후였다. 신사참배 반대에 대한 그의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교인들의 잘못된 결정까지도 함께 떠안고 싶었던 한경직은 신의주의 모든 교역자들과 함께 신사참배를 허락하고 말았다.이 결정으로 괴로워하던 그는 환상 가운데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그 후 일제로부터 교회 추방 명령을 받게 되자 4년간 그가 세운 보린원에서 지냈다. 한경직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온 최고 지성이었지만 분뇨통을 맨 촌부이자 고아들의 아버지로 사랑을 실천하며 해방을 기다렸다.

영락교회 목회

한경직은 1945년 12월 2일에 첫예배를 드리면서 영락교회의 전신인 베다니교회를 세웠다. 영락교회 교인들 가운데는 서북지방에서 월남한 피난민들이 많았다.초창기 영락교회는 탈출 성도들의 만남의 장소, 피난민들의 상호 위로의 집, 신앙의자유를 얻은 감사 기도의 집, 혈육이산의 아픔을 달래는 몸부림의안방, 조국분단의 분함을 호소하는 눈물의 밀실, 무너진 제단을 기필코 되찾아 수축하리라는 서원의 다락방이었다.

한경직은 우리 민족이 당면한 시급한 문제를 죄, 무지, 가난으로 보았다. 그는 영락교회를 목회하면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민족을 살리고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애썼다.죄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영혼을 살리기 위한 전도와 선교에 박차를 가해 전국에 수많은 개척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했다.

또한 민족복음화운동을 펼쳐 기독교 복음으로 새로운 정신을 소유한 새로운 사람,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 힘썼다. 최찬영 선교사를 해방 후 첫 해외선교사로서 태국에 파송해 한국교회에 해외선교의 장을 열었다.

한경직은 우리 민족의 무지를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 체계적인 교회학교 프로그램을 도입해 주일학생뿐만 아니라 장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교회교육을 펼쳤다. 또한 여러 학교들을 세웠고 특별히 일제에 의해 폐교된 숭실대학을 영락교회 내에서 다시 재건했다.

가난을 극복하는 방편으로 다양한 계층의 소외된 이웃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구제활동을 전개하고 여러 사회복지시설을 설립해 봉사하는 교회로서 역할을 감당했다.

이처럼 시대적 필요를 간파하고 그 시대에 맞는 다양한 사역을 펼치는 한편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영적 카리스마가 담긴 말씀은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와 육적인 필요를 동시에 채워 주었다. 또한 어려운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통해 꿈과 위로를 전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밖에 영락교회는 초창기에는 대한민국 건국과 애국활동의 산실이 되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교회를 이끌어 가는 대표적인 교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처음에 27명이 모여 첫예배를 드린 영락교회는 급성장하여 한경직이 은퇴할 무렵에는 전체 성도가 15,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한경직은 27년간 영락교회를 목회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로 성장시켰다.끌어 냈다.

한국교회 목회

그는 1970년대부터 한국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대중 전도운동과 복음주의 전도운동에 다양한 업적을 남겼고 우리나라 기독교 인구가 10년 사이에 배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감당했다

한경직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1973년에 빌리 그래함 서울집회가 개최되도록 하였으며, 그 다음 해에 있었던 엑스플로 ’74가 성공하도록 전국 교계의 협력을 이끌어 냈다.

또한 20개 교단, 26개 기독교 기관과 단체들로 이루어진 협의체인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총재로서 한경직은 다양한 기념행사와 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인천에 선교사 상륙기념비를, 용인에 순교자기념관을,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선교기념관을, 서울 등촌동에 실로암 안과병원을 각각 세웠다.

'84선교대회 여의도 집회는 약 100만 명이 집회에 참석해 세계 기독교 역사상 한 장소에 그렇게 많은 이들이 모여 예배드린 유례없는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한경직은 이 집회를 통해 한국 교회가 지난 100년 동안 ‘받는 교회’였지만 앞으로 ‘주는 교회'로 전환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생명력 있는 교회로 부상하는 데 한경직이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