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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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이승훈

1864년에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난 이승훈은 가난한 서민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를 잃고 16세에 유기상의 점원이 되었다. 10여 년
동안 유기행상과 공장 경영으로 많은 재산을 모은 그는 국내 굴지의
대실업가로 성장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고종이 강제로 물러나면서
나라의 정세가 위태로운 시기에 이승훈은 평양에서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40대의 나이에 사회운동에 뛰어들어
강명의숙과 오산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썼다. 그리고 신민
회에서도 활동했으며 1910년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승훈은 1911년에 105인 사건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고,
1919년 3·1 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에 참가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 결과 그가 설립한 오산학교의 모든 교사들이 검거되고,
학교와 교회가 불탔다. 그러나 조만식, 유승모, 박우병, 장지영, 백봉제,
현상윤 등의 노력으로 7월에 오산학교는 다시 문을 열었다. 1922년 에
가출옥한 이승훈은 용동에 자면회를 세우고 1천여 평의 땅을 기증해
공동경작제를 실시했다. 또한 이상재, 유진태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설립하고,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교육사업을 계속했다. 1930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시신을 교육용으로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방해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에게는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관련 홈페이지

남강문화재단http://www.namgang.or.kr

한경직과 이승훈

한경직은 1916년에 오산학교에 입학해 설립자인 이승훈을 처음 만났다.
한경직은 예배를 드릴 때 불을 뿜는 듯한 열정을 갖고 설교하던 이승훈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우리가 4학년인가 되었을 때요. 어느 날 저녁에 졸업반 학생을 한 너댓
명 불렀어요. 가니깐 선생이 자리에 누웠어요. 우리가 가니깐 겨우 일어
나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전에 끌려가서 일본사람에게 너무 매를 맞아서
언제나 이때가 되면 그 맞은 자리가 아프다.’ 그래요. 그래서 아프단 이야기를
하면서 매 맞은 그 푸릇푸릇한 자리를 보여요. 그때 3.1 운동 일어나기 전
해인데 그 선생의 말씀을 잊지못하는 건 이런 말을 해요. ‘지금은 일본
사람들이 모든 세력을 다가지고 모든 걸 다 주장하니깐 일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를 않아. 그렇게 되니까 애국지사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변한다. 다만
너희들은 분명히 알라. 다른 사람 어떻게 하든 지나 이승훈이는 조선사람으로
살다가 조선사람으로 죽는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 후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노인이 그 이야기하시려고 우리를 청했단 말야. 특별히 그날 저녁에...
그러니깐 이제 그런 이야기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단 말이야요.”
-「한경직 목사」, 김병희 편

이승훈은 한경직의 미국 유학 기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죽거든
그 몸을 대학에 주어 학생들이 연구하는 실험재료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비록 일본 관헌들의 간섭으로 실행되지는 못했으나 민족을 위해 자기의 몸까지
기꺼이 주고자 했던 그의 정신에 한경직은 깊은 감화를 받았다.

해방 이후 한경직은 남강문화재단 초대
이사장으로 일했고 오산학교 동문, 사회
주요인사, 정부의 후원을 받아 서울대공원에
이승훈의 동상을 세웠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
한 소년 시절에 위대한 인격자요, 애국자인 이승훈의 가르침을 받은 것에 대해 한경직은 두고두고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