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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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소년 한경직, 기독교에 입교하다

한경직은 음력 1902년 음력 12월 29일(양력1903년 1월 27일)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가난한 농부 한도풍 씨와 청주 이씨 사이에서 3남 1녀 중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한경직의 아버지 한도풍은 열두 살쯤 되었을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당시 열다섯 살이던 형이 가산을 모두 탕진해한도풍은 육촌형 집에서 심부름과 일을 하며 자랐다. 타고난 성품이 인자하고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어른들의 사랑을 받았고, 서당에도 다녀 보지 못한채 독학으로 한글을 익혔다. 자작농으로 자수성가 한 후에 늦은 결혼을 한 한도풍은 아들을 일찍 결혼시키고, 힘닿는 데까지 공부를 시키겠다는 결심을하게 된다

한경직의 어머니는 그가 만 일곱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 어린 한경직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남겼다. 어머니가돌아가시고 1년 후쯤 후모를 맞이하게 되는데 후모는 전처 소생인 한경직과 자신이 낳은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고 사랑으로 길렀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인자하신 모습밖에 없다. 성품도 온유하셨지만 목소리도 부드럽고얼굴도 인자하셨다. 백부와 달리 술을 하실 줄도 모르고 자식들을 책망하실 줄도 몰랐다. 우리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어 그것이 못내 안쓰러워그러셨는지도 모르겠다.” -「 나의 감사

한경직이 태어난 평원군 공덕면 간리는 평양에서 100리쯤 떨어진 곳에 ‘어파’라는 정거장이 나오는데 거기서다시 동북쪽으로 10리를 더 들어가야 나오는 ‘자작’ 혹은 ‘샛말’이라고 불리는 작고 외딴 마을이었다.

원래 대대로 유교를 숭상하는 마을이었으나 원산에서 평양으로 가던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선교사가 길을 잘못 들어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낸 것이 계기가 되어 마을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1895년에 자작교회가 세워졌다. 그당시 자작교회에는 전담 교역자가 없이 우용진 전도사가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여 예배를 인도했다. 한경직은 주일마다 자작교회에 나가 성경과 찬송을배우며 기독교 분위기 속에 성장했다. 한경직이 제일 먼저 배운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3장16절이었다.

그는 같은 마을에 사는 오촌 숙부댁 대문에 크게 써 붙어 있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접하며 처음으로 한글을 익히게 되었다.이 성경말씀은 평생동안그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한경직은 마포삼열 선교사에 의해 세워져 자작교회에서 운영한 진광소학교에 다녔다. 이 학교는 전교생이 30-40명이었고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대성학교 출신인 홍기주 선생이 성경, 찬송, 한국 역사 등 여러 가지 신학문을 가르쳤다. 당시 소학교는 8년제였고 월반제도가 있었다. 한경직은 6년 만인 1916년에 진광소학교를 졸업했다.

“우리 동네에는 한문 서당이 있었고, 교회에서 경영하는 조그마한 학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저를 한문 서당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한문서당에는 우리 할아버지 가운데 한 분이 훈장으로 계셨는데도 진광소학교라고 하는 기독교학교에 보내어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어릴 때부터 성경을 배우고 교회에 나갔습니다.” -「한국 기독교와 역사」 창간호

학창시절

오산학교에서 민족의식을 배우다

한경직이 진광소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의 아버지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 당시 시골 소년이 소학교를 마치고상급학교에 진학 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 때문에 한경직의 진학을 망설이던 아버지를 설득한 사람은 진광소학교에서 그를지도하던 홍기주 선생과 자작교회 우용진 전도사였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집에 한 마리밖에 없던 소를 팔아 한경직을 계속 공부시키기로 결심하게된다. 한경직은 그들의 결정에 의해서 거리상 가깝고 선교사가 세운 평양의 숭실학교보다는 간리에서 200리 떨어져 있지만 남강 이승훈이 세워 철저한 애국교육을하는 정주의 오산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그는 입학시험을 치러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 고 다음날 2학년 보결시험을 통과하여 곧바로 2학년 과정을배우게 된다.

한경직은 오산에서 3년 동안 철저한 애국애족 정신과 기독교 신앙, 현대 학문과 기술을 배웠다.특별히 설립자인남강 이승훈과 그 당시 교장이었던 고당 조만식을 통해 민족정신을 배웠고, 평생 동안 인생의 큰 스승으로 삼게 되었다.

한경직은 오산학교를 졸업하던 1919년 봄에 3·l 운동이 일어나 학교가 문을 닫게 되어 졸업식을 못한 채학교를 떠나야 했다

“요즘에 와서 제가 오산학당에서 무엇을 배웠나 생각해 보거든요. 그러고 보니 그분들이 늘 세 가지를 강조한것이 생각납니다. 첫째는, 그때가 나라가 망한 때니까 ‘나라를 도로 찾는 일이 우리 한국 청년들이 할 일이다’ 하고 애국사상을 고취했습니다. 둘째는, 우리가 나라를 찾고 민족을 부흥시키려면 현대 학문, 특히 과학을 배워야 한다면서 과학을 많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셋째는, 아무리 애국심이 있고과학적 지식이 있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먼저 사람이 바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사람이 바로 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 기독교와 역사」 창간호

숭실대학에서 과학도의 꿈을 키우다

오산학교 졸업 후 더 배우고 싶은 열망을 뒤로한 채 고향으로 돌아간 한경직은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고 가정을돌보다가 영성소학교 교사생활을 하게된다. 그러던 중에 평양경찰서 폭탄 투척사건이 일어난 후 억울하게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난국을 헤쳐 나가기위해 힘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산학교에서 배운 대로 민족을 위해 봉사하려면 과학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숭실대학 이과(理科)에진학했다.

숭실대학은 구한말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4년제 대학이자 국내 유일의 대학이었다

한경직은 매학기 최우수 성적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뿐만 아니라 YMCA운동에 참가해 학생들의 신앙을 지도했고, 방학 때마다 순회전도대원으로전도여행을 하며 설교를 하곤 했다.

또한 교내 웅변대회, 평양성 기독청년 웅변대회, 서울에서 열린 YMCA 웅변대회에 참가했다.

소래해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다소래해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다

숭실대학에 재학 중에 한경직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방위량(William N. Blair) 선교사의 비서로일했다. 그는 3학년 여름방학에 방위량 선교사의 번역작업을 돕기 위해 찾은 소래 해변에서 홀로 기도하던 중 에 “너는 온전히 나에게 몸을 바쳐서복음을 위해 살아라”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다. 이를 계기로 한경직은 과학도로서 민족을 선진화하여 독립을 이루려던 뜻을 바꾸어, 정신분야에서기독교 정신을 기반으로 우리 민족에게 기여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날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습니다만, 제가 평소와 같이 해변을 걸어가고있을 때였습니다. 너무도 갑자기 저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저는 주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분명한 부르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해변에서 여러 시간 동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저는 다른 사람으로변화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엎드려서 더 많은 기도를 드리고 오랜 시간 동안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 ‘템플턴상 수상 연설문’

유학시절

엠포리아대학교에서 경건한기독교 교육의 전통을 배우다

한경직은 방위량(W.N. Blair) 선교사의 조언에 따라 신학을 공부하기 위한 준비로 숭실대학에서 배우지못했던 인문과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하고. 방위량 선교사의 주선과 윤치호의 도움(뱃삯)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 장로교에서 세운 엠포리아대학(Collegeof Emporia)에 입학하였다. 엠포리아 대학은 매일 채플을 드려 학장과 학감을 비롯해 교수들이 돌아가며 설교를 했으며, 신앙과 일반 학문을 균형 있게 교육하는 학교였다. 한경직은 이곳에서 심리학과 윤리학, 역사와 철학 등을 공부했다.

한경직은 낯선 미국 땅이었지만 자신을 믿고 이곳까지 보내 준 이들, 자신과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두려울 것이 없었다. 밤낮없이 도서관에서책을 읽으면서도 학문이 주는 기쁨에 피곤한 줄 몰랐고, 의상실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열심히 공부한 그는 숭실대학에서의학점을 인정받아 1년 만에 엠포리아대학교를 졸업하여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엠포리아대학으로 보내시면서, 작지만 미국 기독교 대학의 전통이 무엇인지알게 하셨다. 그것은 엠포리아대학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하나님께 늘 감사한 이유 중 하나다.” -「 나의 감사 」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목회자 훈련을 받다

한경직은 그 당시 미국 북장로교 소속 신학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된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받았다. 그는 150년 역사의 오래된 교정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학들로 구성된 교수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평생 동안 목회자의 길을 걷는 데 필요한토대를 갖췄다.

한경직은 이곳에서 개인적인 경건과 학문적 권위를 두루 갖춘 목회자로 훈련받으면서 성실하게 공부했다. 학비는 엠포리아대학교 학장의 추천으로 장로교에서파송한 멕시코 선교사였던 필립스 선교사의 지원을 받았고, 나머지 부족한 돈은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충당했다.

그는 이곳에서 박형룡, 최윤관, 백낙준의 뒤를 이어 윤하영, 이규용과 함께 신학수업을 받았다. 그가 프린스턴에머무는 동안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간의 극심한 논쟁으로 인해 학교 분위기가 혼란스러웠지만 학생회장으로 활약했고,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설교상을 받기도했다.

“한국의 외딴 산골에서 태어난 부족한 사람이 이 역사적인 프린스턴신학교에서 3년 동안공부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그 뒤에서 이 부족한 사람을 붙들어 준 많은 선배와 친구들의 은혜에 감사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는그분들의 은혜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 「나의 감사」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조국을위해 일하기로 결심하다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한 한경직은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교회사를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고자 했다. 그런데 입학을위한 신체검사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나왔다. 폐결핵 2기였던 것이다. 그는 진학뿐만 아니라 어쩌면 인생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맞게 되었다. 그 당시 폐결핵 2기는 사형선고와 같았다. 자연요법인 요양 외에는 폐결핵을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한 한경직은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교회사를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고자 했다. 그런데 입학을위한 신체검사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나왔다. 폐결핵 2기였던 것이다. 그는 진학뿐만 아니라 어쩌면 인생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맞게 되었다. 그 당시 폐결핵 2기는 사형선고와 같았다. 자연요법인 요양 외에는 폐결핵을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쾌적한 독방에 누워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하나님께 고백할 것이 참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신학교에 갔지만 돌아보니 죄가 얼마나 많던지, 그동안 깨닫지 못한 죄도 있고 젊은 시절 유혹과 시험을 받고 마음으로지은 죄도 있고 개인적인 야망도 참회할 일이었다. 나의 더러운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며 부족한 나를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내려놓았다. 일일이다 기억할 수는 없으나 이전보 다 더욱 온전히 내 몸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결단하고 힘썼다.” - 「나의 감사」

사역시절

교사로서 조국을 위한 봉사를 시작하다

미국에서 돌아온 한경직은 오산학교 시절 은사인 고당 조만식의 권유로 숭인상업학교에서 일하게 된다. 그 당시숭인상업학교는 선교사들이 아닌 한국 기독교인들의 힘으로 세워진 학교로서 고당 조만식이 이사장으로 있었다. 숭인상업학교는 성경을 가르치고 매일 기도회를갖는 등 온전한 기독교 교육을 펼치고 있었다. 한경직은 이 학교에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고 조회 시간에 설교를 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숭실대학교장이던 윤산온(G.S.McCune) 선교사의 권유로 모교인 숭실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견해가 교사로서 부적격이라는이유로 교원인가가 갑자기 취소되었다. 또한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것을 문제 삼으며 숭실대학 교수 취임을 강력하게 반대해 결국 교육자로서 그의 꿈은좌절되고 말았다. 일제의 방해로 교단에서 서지 못하게 된 한경직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고 본래 계획대로 교회로 돌아가서 봉사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나는 숭인상업학교에 그리 오래 있지 않았다. 가을에서 그 다음 해 봄까지 있었는데그때 가르친 학생들과는 지금도 연락을 하며 지낸다. 짧은 기간이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중학 시절에 정성과 열의를 가지고 옳은 길로 인도하면 깊은신앙심을 갖게 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 나의 감사 」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와 복지사역을 시작하다

한경직은 가난하고 교회 건물도 없지만 장래성 있는 청년들이 많고 할 일이 많은 신의주 제2교회의 부름을 받아그곳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다.

“교회는 수리한 오래된 집에서 모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방 안에 서 있던 열 개나 되는기둥들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약 300명쯤 되는 교인들은 열심히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이때 저는 평민의 한 사람으로 가난한 무리 중에 끼어 있다는행복감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저는 기도하고, 설교하고, 나아가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봉사에 힘썼습니다.” - ‘템플턴상 수상 연설문’

목사가 된 이후 한경직에 대한 소문이 신의주 일대에 퍼지면서 많은 청년들이 신의주 제2교회로 몰려들었다. 그 당시 청년들에게 온건한 신학적기초와 지식이 필요함을 느낀 그는 청년들이 신앙을 생활화할 수 있도록 돕고 건강한 사상을 가질 수 있도록 가르쳤다. 또한 민족의식의 고취와 구체적인애국의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일념 하에 각종 세미나를 통하여 청년들을 계몽시켰다.

한경직은 초대 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이었던 전도사업, 교육사업, 봉사사업을 교회의 주요 과제로 삼았다.

특히 신의주 제2교회 목회 당시 ‘복순’이라는 어린 고아와의 만남을 계기로 고아들과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보린원과 양로원을 설립해 봉사사업에 더욱 힘썼다.

신의주 제2교회는 교인들이 많이 늘어나 예배공간이 부족함에 따라 2년 만에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크게 성장하는교회가 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한경직이 미국에서 공부한 것을 꼬투리 잡아 배일사상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그를 교회에서강제 추방시켰다. 그 후 그는 보린원에서 고아들, 노인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그들을 섬기면서 해방을 맞이했다.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역을 펼치다

해방이 되자 한경직은 신의주자치위원회를 결성해 사회 치안을 담당하고 일본인들이 평화적으로 돌아가도록 했으며공산당에 맞서는 조직으로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세웠다. 소련군이 북한땅에 진주하면서 점점 세력을 확장해 가던 공산주의자들은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을탄압하고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산당의 움직임을 피해 한경직은 1945년 10월에 윤하영, 김치선과 함께 월남하였다.

그가 월남한 지 2개월 뒤인 1945년 12월 2일에 서울 영락정(지금의 중구 저동)에 있던 천리교 경성분교건물에서 27명의 성도들과 함께 첫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베다니 전도교회’의 출발이었다.

1946년에 교회 이름을 영락교회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락교회는 피난민들이 세운 ‘피난민 교회’로 소문나면서 38선을 넘어 남하한피난민들, 만주를 비롯한 중국 일대에서 귀국한 동포들, 멀리 사할린 등지에서 온 사람들까지 모여들었다. 한경직은 이곳에 모여드는 피난민들을 위해살 곳을 제공하고, 기독교 복음을 전해 위로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처음에 27명이 예배를 드린 영락교회는 급성장하여 1년 만에 재적교인이 1,000명을 넘어서고, 1947년 말에는 4,500명이나 되었다. 한경직이 은퇴할 무렵에 영락교회는 전체 성도가 15,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는 깊은 복음의 진리를 평이한 말로 풀어가면서도 영적 카리스마를 지닌 한경직의 설교, 말씀대로 믿고 실천하며모범을 보인 그의 삶, 개인적 전도와 구원을 넘어 민족과 나라를 살리는 일을 강조하고 행동한 그의 목회활동이 이루어 낸 결과였다. 한경직은 27년간영락교회를 목회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로 성장시켰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한경직은 영락교회를 이끄는 목회자에서 벗어나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한국전쟁 당시 고통에처한 민족을 살리는 일에 앞장섰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기독교 라는 새로운 정신 아래 건강한 민주국가로 발전하도록 전 국민을 대상으로 다양한 방법의복음화운동과 정신혁명운동을 펼쳤다. 그는 교육사업에도 헌신해 새로운 학교를 세우고, 북한에서 폐교된 여러 학교를 재건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나라를 사랑하는 인재를 양성하기위해 힘썼다.

한경직은 사람에게 잘 봉사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밥 피어스와 함께 월드비전을세워 활발한 봉사와 구호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고아, 전쟁미망인, 노인, 장애자 등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을 위해 고아원, 모자원, 양로원, 노인전문 요양시설, 장애인 시설을 마련했다. 그는 이러한 시설들이 일시적인 활동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활동이 가능하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동원해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힘썼다.

이밖에 한경직은 장로교 총회의 대표로서, 초교파적으로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한국 교회의 부흥과연합에 최선을 다했다. 특히 그가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지향했던 에큐메니칼(연합과 일치) 주의는 한국 교회 발전과 민족복음화운동의 토양이 되었다.

은퇴 후 사역시절

영락교회에서 27년의 목회를 마치다

한경직은 선천적으로 약한 몸을 지녔고 유학시절에 폐결핵이라는 죽음의 고비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의주에서 13년, 영락교회에서 27년, 모두 40년간의 목회와 그 외 다양한 사역을 열정적으로 감당했다. 그리고 1973년 1월 2일에 은퇴하여 원로목사로추대되었다. 그는 은퇴할 때에도 자신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고백할 정도로 겸손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래 살 줄 몰랐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왔습니다. 은퇴하는저에게 분에 넘친 말씀을 해주셨는데 영락교회 목사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하나님께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영락교회가 복 받은 것은 당회원들의 충성, 권사들의 노고, 남녀 집사와 권찰들의 수고, 교회학교 교사들과 성가대원들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교회를 사랑하였습니다. 지금 저는 여러분 앞에 사과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교인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들의 어려움에 동참하지 못하였고, 그분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때가 많았습니다....” – ‘원로목사 추대식’

군복음화 운동 등 민족복음화에 앞장서다

한경직은 그동안 펼쳐 온 군선교 활동을 확대해 군복음화 운동에 힘썼다. 1966년 베를린세계선교대회에서 학교, 군대, 공장이 전도의 황금어장임을 깨달은 그는 이 세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일선에서 물러난 다음부터는 집중적으로 군복음화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민족복음화를 이루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60만 군인을 복음화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오늘날 군대내에 세워진 교회 가운데 약 절반 이상이 영락교회를 통해 세워지거나 지원을 받았다. 또한 한경직은 “5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 아래 여의도에서 대규모 전도집회를 열고, 외항선교, 학원선교, 산업선교, 문서선교, 방송선교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민족을 복음화하는 데 더욱 헌신하였다.

아시아복음화와 세계복음화를 꿈꾸다

한경직은 민족복음화를 추구해 나가면서도 아세아복음화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밥 피어스 목사의 도움을받아 아세아교회진흥원을 세웠다. 그는 회교국 또는 불교국이 대부분인 동남아의 복음화를 한국 교회에 부여된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세아교회진흥원을통해 보다 폭넓은 사업을 펼쳤고 그 결과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또한 빌리 그래함, 밥 피어스 등과 함께 아시아 및 세계 여러 곳에서 ‘목회자수양회‘를 열었다. 이를 통해열악한 선교 환경에서 헌신하는 목회자들에게 휴식과 재충전, 그리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세계 복음화를 이루는 데 노력했다.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사업을 펼치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는 20개 교단, 26개 기독교 기관과 단체들로 이루어진 협의체였다. 한경직은넓은 포용력을 발휘해 이 단체의 총재로 그 임무를 감당하여 다양한 기념행사와 사업을 전개했다. 인천에 선교사상륙기념비를, 용인에 순교자기념관을, 서울 양화진에 외국인묘지의 정비와 선교기념관을, 서울 등촌동에 실로암 안과병원을 각각 세웠다.

'84선교대회 여의도 집회는 약 100만 명이 집회에 참석해 세계 기독교 역사상 한 장소에서 헤아릴 수 없이많은 이들이 모여 예배드린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한경직은 이 집회를 통해 한국 교회가 지난 100년 동안 ‘받는 교회’였지만 앞으로 ‘주는교회'로 전환해야 함을 강조했다.

세계를 무대로 목회활동을 전개하다

한경직은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목사로서 세계 각국의 초청을 받아 말씀을 전했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교포들의 교회를 찾아다녔다. 1970년대의 활동만 살펴보면, 은퇴한 1973년 2월부터 한 달 동안 싱가폴과 태국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를 인도했고, 6월에는 2주 동안오사카와 동경에서 열린 재일 한인교회 연합전도대회를 인도했다. 1975년 1월부터 3개월 동안 세계 선명회 이사회에 참석하여 새로운 사업계획을 협의했고 재미한인교회 연합집회를 인도했으며, 싱가폴 하가이전도지도자훈련원에서 특강을 했다.

1975년 10월에는 빌리 그래함 목사와 함께 대만과 홍콩에서 전도집회를 인도했고, 11월에는 10일 동안이란 기독교 교역자 세미나의 주강사로 활동했다. 1976년 1월에는 3개월 동안 국제선교협의회 강사로, 재미 한인교회 순회집회 인도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6월에는 동경에서 제9회 재림대망전도대회 주강사로 말씀을 전했다. 1978년 7월에는 1주일 동안 일본어판 설교집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고 재림대망 전도대회 강사로 집회를 인도했다. 11월에는 일주일 동안 싱가폴하가이 전도지도자훈련원 강사로 말씀을 전했다. 이처럼 한경직은 세계복음화를 위한 일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고 어디든지 달려갔다.

하나님의 품으로

청빈한 기도의 삶을 이어가다.

노년에 한경직은 교회에서 마련한 좋은 집을 마다하고 남한산성 영락여자신학교 근처에 있는 18평짜리 국민주택을거처로 삼아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목회자는 돈과 여자와 근검절약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 따른 선택이었다.

그는 남의 집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산다는 뜻의 ‘한경직 우거처’라는 팻말을 붙여놓고 지냈다.

그는 이 우거처와 근처 기도바위에서 우리나라와 민족, 그리고 남북통일을 위해 날마다 기도했다.

나라와 이웃과 함께한 98년의 생을 마치다

한경직은 새로운 천 년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고난주간인 2000년 4월 19일 오후 1시 15분에영락교회 안에 있는 사택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98세였다.

영락교회에 마련된 빈소에는 어린아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 영부인에서부터 이름없는 평범한 이들까지, 기독교계 지도자뿐만 아니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과 불교 송월주 조계종 전 총무원장까지 많은 이들의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4월 24일 장례예배에는 8천여 명이 참석해 한경직의 마지막을 함께했고 그와 함께 한국 교회를 위해 다양한사역을 펼쳤던 김준곤, 방지일, 정진경, 강원용 목사의 기도와 설교, 조사가 이어졌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영락교회에서 하관예배를 드린 후 그는 아내 김찬빈과 합장되었다.

한경직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 한 칸, 땅 한 평, 통장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남긴 재산은 말년에타고 다녔던 휠체어와 지팡이, 겨울 털모자, 옷 몇 가지, 생필품이 전부였다.

“세계는 가장 위대한 크리스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을 잃었지만, 천국에서는 사도와교부에 버금갈 신앙의 거장을 얻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우리가 오늘 여기 이토록 슬픈 것은/당신이 주님 곁에 가심이 싫어서가 아니요/당신을영원히 우리 곁에 두고 싶어서도 아닙니다/ 아무리 둘러봐도/당신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당신 같은 스승은 하나도 없고/당신 같은 목자는 하나도없고/이 텅빈 세상이 너무 슬퍼서입니다“(고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