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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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한반도를 지나는 북위 38도선 이북을 점유하고 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 이남의 대한민국을 남침함으로써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우리 역사 가운데 가장 처참하고 엄청난 전쟁 피해를 남겼다. 1952년 3월 15일까지 전쟁으로 재난을 입은 전재민 수가 천만 명을 넘어섰고 휴전 시에는 전체 인구의 1/2 이상을 차지했다. 한국전쟁은 전사자, 부상자뿐만 아니라 약 20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낳았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독자적으로 또는 해외기구들과 함께 다양한 봉사사역을 전개했다.특별히 각 교회 내에 성경구락부를 개설해 1955년에 1,856명의 기독교 교사들이 전국 696곳에서 근로 및 빈곤청소년 7만여 명에게 성경과 한글, 초등교육에 필요한 일반상식을 가르쳤다.1970년대 근로계층 가운데 대부분이 한국전쟁 당시 10세 전후의 어린이였던 사실을 감안하며 그중에 빈곤가정의 자녀, 전쟁 중 부모를 잃은 고아 등도 상당한 비율을 차지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전쟁 중에 펼쳐진 한국 기독교의 아동복지사업, 빈민구제사업 및 성경구락부를 통한 초등교육사업이야말로 1970년대 산업화 과정을 성공적으로 전개해 우리나라가 오늘날 경제대국으로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고 있다.한국전쟁은 오늘날까지 휴전상태를 유지하면서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남아 있다. 또한 우리 민족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민족이다. 그동안 양국 정부가 적지 않은 평화공존 또는 평화통일의 노력들을 기울여왔지만 아직도 국지적인 충돌이 일어나는 위험스런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평화적인 통일은 우리 민족의 최대의 소원이 되고 있고, 통일을 이룩하고 나라가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나가길 많은 국민이 염원하고 있다.

전쟁의 고통에 신음하는 이웃의 아버지, 한경직

한경직은 한국전쟁을 맞아 단순한 교회지도자를 넘어 반공주의자요 사회 복지가요 애국자로서 많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난길에 오른 한경직은 피난지 부산에 영락교회를 세웠으며, 어려움 속에서도 보린원 사업을 계속하였고 다비다모자원을 설립해 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잃은 미망인들과 그 자녀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는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해 전세가 다시 악화되자 미공군에게 요청하여 서울 보린원에 내려와 있던 60여 명의 어린 고아들을 미군 수송기에 태워 제주도로 피난시켜 그들의 생명을 건져냈다.

한경직은 피난지 부산에서 밥 피어스와 재회해 전쟁고아와 전쟁미망인들을 위한구호사업을 열정적으로 펼쳤고, 400여 명의 목사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는 구국기도회를 열기도 했다. 부산에서 각 교파 지도자들을 소집해 피난성도 구호대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기독교연합전시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해 회장 자격으로 미국 트루먼 대통령, UN 사무총장, 맥아더 사령관 등에게 한국인들의 진의가 담긴 메시지를 보내는 등 구호를 위한 활동에 분골쇄신 일했다. 그 결과 트루먼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한국 사수 의지를 표명하고 용기를 전하는 회신을 받기도 했다.

한경직은 더욱 용기를 얻어 미군사령부와 교섭해 피난민들을 위한 원조물자를 얻어 왔고 미국 기독교계와 교섭해 식량을 비롯한 생활 필수품 등을 원조받아 이들에게 나눠 주었다. 한국전쟁 당시 세계 각지에서 도움의 손길을 펼치기 위해 수많은 외국민간원조기관들이 한국땅을 찾게 되었다. 한경직은 이들이 원활한 활동을 전개하고 구호품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앞장서서 협력했다.한국전쟁 때부터 한경직은 한국 교회사에서 영락교회목사라기보다는 한국 교회가 필요로 하는 목사요, 목사 중의 목사로 기록되었다. 그는 이러한 민족적인 시련의 기간 동안 목사로서, 교회지도자로서, 구국운동의 실천가로서, 애국애족정신을 간직한 민족지도자로서 그의 몸을 바쳐 혼신의 애국충정을 나라를 위해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