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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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 1910년 8월 29일-1945년 8월 15일)는
한국 민족의 오랜 역사 가운데 유일하게 민족의 정통성과 역사가 단절된 시기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지배는 시대에 따라 다소
정책의 변동이 있었으나 효율적인 식민 지배를 위한 탄압, 영구예속화를 위한 민족 고유성 말살과 우민화(愚民化), 철저한 경제적 수탈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 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들이
전국적으로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으로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부른다. 2개월 동안
전국에서 시위가 발생했고, 일제는 대대적인 학살과 만행으로 탄압했다.
3.1 운동은 여러 종교단체들이 연합하여 진행한 거국적 애국운동이었고,
그중에서 교회의 역할이 가장 컸다. 이 운동의 많은 지도자들이
기독교인이었고, 대부분의 집회장소가 교회당이었으며, 가장
박해를 심하게 받은 이들도 기독교인들이었다.

일본 총독부가 기소한 3.1 운동 참여자 6,147 중 기독교인이
1,543명으로 전체의 25%를 차지하며, 그 외에 2,000명이나 되는
기독교인이 살해되었다. 이처럼 기독교는 3․1 운동에서 큰 공헌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망으로 끝남에 따라 1945년 8월 15일
한국은 35년간의 일제의 무자비한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했다.

애국정신과 민족의식을 가슴에 품고 실천한 한경직

한경직은 일제강점기 동안에 어린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냈고, 조국을 위해 일하겠다는 생각으로 유학을 하였고
, 귀국 후 일제의 만행과 억압 속에 살면서 배일정신과
애국정신에 의한 다양한 사역을 하였다.

1890년대 말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면서 이 지역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일본이 대륙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던 1902년,
한경직은 평안남도 간리의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아홉 살 때 되던 해에 조선은 일본에 강제적으로 합병이 되었고
마을 어른들이 나라를 잃은 슬픔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일제의 어두운 그림자가 조선 땅에 깊이
드리워지는 가운데 이 땅에는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특별히 한경직이 태어난 평안도 지역은
기독교 복음의 씨앗이 일찍 싹튼 곳이었고
그는 어릴 때부터 복음을 접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오산학교에 진학해 그 당시 대표적인 애국지사였던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면서 그는 배일사상과 함께 강한 애국정신을
가슴 속에 품게 되었고 무엇보다 나라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그는 선교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평양지역에 자리한 숭실대학교에
진학해 선교사들과 교류를 가졌다. 이러한 시기를 거치면서
한경직의 의식 속에는 기독교 신앙과 애국정신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숭실대를 졸업한 후 기울어져 가는
나라와 어려움을 겪는 민족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뜻을 품고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폭넓은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한경직이 유학길에 올랐을 때 잠시 들른 하와이의 대한인국민회
총회 사무실에서 교차되어 걸려 있는 태극기와 3·1 운동 때
사용한 독립선언서와 33인 명단을 보게 되었다. 조선 땅에서
볼 수 없었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먼 이국 땅에서 발견한
그는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쏟았고 다시 한 번 나라의 소중함을
깊이 새겼다.

유학에서 돌아온 한경직은 조만식이 교장으로 있던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들의 가슴에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심었다. 이후 숭실대학의 교수로 일하고자
했지만 일제의 반대로 그 꿈을 접어야 했다.
그 후 그는
신의주에서 목회를 시작해 특히 청년들을 기독교 정신으로
새롭게 하고 바른민족의식과 애국심을 전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신사참배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고통을 받았고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목회를 중단하게 된 한경직은 보린원에
들어가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기도하면서 민족의 해방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