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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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시대

우리나라는 6.25의 폐허 위에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경제개발에
온 국민의 역량을 집중하였다. 1962년부터 1991년까지 다섯 번에
걸쳐 추진된 경제개발계획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 기간 동안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산업생산만이 아니라 직업구조, 소비방식,
도시체계, 계층구조, 국가의 성격 등 사회 전반의 변화를 초래했다.

특히 1960년대에는 정부 주도 아래 수출산업 육성 정책이 펼쳐지면서
경공업이 육성되었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중화학 공업이
육성되고 수출 상품의 고도화가 이루어졌다. 1961년에 불과 82달러였던
GNP(Gross National Product, 국민총생산)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마무리된 1966년에는 125달러에 육박했고, 1969에는 1,676달러로
비약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경제개발에 역점을 둔 급속한 산업화는 저임금과 산업재해,
실업문제, 농촌의 피폐 뿐만 아니라 인구의 도시집중, 범죄와 비행의
만연, 향락·퇴폐 문화의 범람 등 한국사회에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과도한 경제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복지문제를 소홀히 함에 따라 노동자와 도시 빈민들의
고통이 극심해지기도 했다. 이러한 시기에 한국 기독교는 청계천이나
청량리 등 빈민지역을 중심으로 한 복지사업을 전개했다. 그리고 빈곤계층
어린이들을 후원하고 가난한 여성들에게 일할 수 있는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탁아사업(보육사업)에 힘썼다. 또한 독재정권의 억압과 탄압
속에서도 사회적 불평등과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고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노동조합운동, 인권운동을 펼쳤으며 문맹퇴치운동,
계몽운동 등을 이어갔다.

기독교 정신으로 민족을 깨우고 젊은이 들을 바로 새운 한경직

한경직은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 빠르게 발전하는 산업화 시대에 올바른
민족의식과 나라를 세우기 위해 기독교 정신으로 민족을 깨우고 젊은이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학교를 설립 또는 재건하여 교육에 힘썼고, 계층과 장소에
따른 다양한 방식의 전도로 민족복음화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한경직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통해 피폐해진 환경에 처한 우리
민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는 기독교 정신을 전파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설교의 중심 주제는 복음으로 인한 구원과 애국과
이웃사랑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설교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의지를 불어넣기 위해 애썼다.

그는 영락교회 예배당에 국기를 내걸었고, 중요한 국가 절기 때에는
찬송가 대신 애국가를 부르면서 교인들에게 애국정신을 심어 주고자
노력했다.
한경직은 이 땅에 기독교 정신을 통한 건강하고 올바른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 아래 군선교, 학원선교, 산업선교, 노방전도, 방송선교 등을
활발하게 펼쳤다. 또한 빌리 그래함 등 해외의 유명한 종교지도자를
초빙해 지역 전도대회를 열어 우리 민족의 정신 혁명과 새로운 변화를
위해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