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훈장으로 한경직은 건국과 발전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에 수상하였다.
프린스턴신학교가 영락교회를 세우고 27년간 이끌며 세계적인 교회로 성장시키고 민족과 세계 복음화에 힘쓴 공로로 수여하였다.
미국의 템플턴경이 제정한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상으로, 종교와 정신사상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에게 부여하는 상으로, 한경직은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수상하였다.
1998년 정부수립 5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선정되어 수상하였다.
한경직의 아버지 한도풍은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집안을 일구느라 공부를 하지 못했고 결혼도 늦게 했다. 그는 아들만큼은 잘 가르치고 일찍 장가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한경직이 열세 살 되던 1916년에 세 살 연상인 김찬빈과 결혼시켰다.
그리고 한경직을 서당에 보내지 않고 자작교회에서 운영하는 기독교학교이자 신학문을 가르치는 진광소학교에 보냈다. 졸업 후에는 집안의 유일한 재산이었던 소를 팔아 오산중학교에 보내어 한경직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어머니 청주 이씨는 매우 부지런하고 사랑이 많았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일했다. 결국 몸이 약해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한경직에게 평생 동안 성실과 근면한 삶의 모범이 되어 주었다.
한경직은 일생을 돌아보며 정말 감사한 것이 있다면 아내를 만난 일이라고 고백할 정도로 아내에 대한 정이 각별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어린 나이에 결혼했지만 한경직은 학업에 전념하느라 집안을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특히 미국유학길에 오를 때는 아내와 어린 딸을 남겨두고 홀로 떠나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 김찬빈은 선교사가 운영하는 숭혜여학교에서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묵묵히 가정을 꾸려나갔다. 아내 김찬빈은 신앙 안에서 인내와 사랑으로 평생 동안 한경직을 내조했다. 생활을 전적으로 도맡아 하면서 한경직의 건강관리를 위해 애썼다.
한경직의 아버지 한도풍은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집안을 일구느라 공부를 하지 못했고 결혼도 늦게 했다. 그는 아들만큼은 잘 가르치고 일찍 장가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한경직이 열세 살 되던 1916년에 세 살 연상인 김찬빈과 결혼시켰다.
그리고 한경직을 서당에 보내지 않고 자작교회에서 운영하는 기독교학교이자 신학문을 가르치는 진광소학교에 보냈다.졸업 후에는 집안의 유일한재산이었던 소를 팔아 오산중학교에 보내어 한경직이 공부를 계속할 수있도록 해주었다. 어머니 청주 이씨는 매우 부지런하고 사랑이 많았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일했다. 결국 몸이 약해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한경직에게 평생 동안 성실과 근면한 삶의 모범이 되어 주었다.
한경직은 일생을 돌아보며 정말 감사한 것이 있다면 아내를 만난 일이라고 고백할 정도로 아내에 대한 정이 각별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어린 나이에 결혼했지만 한경직은 학업에 전념하느라 집안을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특히미국유학길에 오를 때는 아내와 어린 딸을 남겨두고 홀로 떠나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 김찬빈은 선교사가 운영하는 숭혜여학교에서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묵묵히 가정을 꾸려나갔다. 아내 김찬빈은 신앙 안에서 인내와 사랑으로 평생 동안 한경직을 내조했다. 생활을 전적으로 도맡아 하면서 한경직의 건강관리를 위해 애썼다.
가난하고 외롭고 고생스러운 목사의 아내로 살아온 아내 김찬빈이 노환으로 몸져 눕게 되자 한경직은 평생 동안 받아온 사랑의 빚을 갚으려는 마음으로 외부 출입을 삼가고 지극한 정성으로 아내를 돌보았다. 1974년이 마무리되는 12월 31일, 한경직의 그림자로 함께해온 아내 김찬빈은 남편이 지켜보는 가운데 77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한경직은 아내 김찬빈을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인이라고 서슴없이 고백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슬하에 딸 순희(順姬, 1920년생)와 아들 혜원(惠源, 1938년생)을 두었다.
딸 순희는 이영헌(목사, 전 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장)과 결혼하여 2남(이신익, 이신형) 3녀(이순겸, 이순화, 이순형)를 두었다. 아들 혜원은 미국 유학을 거쳐 아버지의 뒤를 따라 목사가 되었으며 Donna Rae Han(한국이름 혜순)과 결혼하여 1남(한영선, David youngsun Han) 1녀( 한영애, Bedany youngae Han)를 두었다.
가난하고 외롭고 고생스러운 목사의 아내로 살아온 아내 김찬빈이 노환으로 몸져 눕게 되자 한경직은 평생 동안 받아온 사랑의 빚을 갚으려는 마음으로 외부 출입을 삼가고 지극한 정성으로 아내를 돌보았다. 1974년이 마무리되는 12월 31일, 한경직의 그림자로 함께해온 아내 김찬빈은 남편이 지켜보는 가운데 77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한경직은 아내 김찬빈을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인이라고 서슴없이 고백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슬하에 딸 순희(順姬, 1920년생)와 아들 혜원(惠源, 1938년생)을 두었다. .
딸 순희는 이영헌(목사, 전 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장)과 결혼하여 2남(이신익, 이신형) 3녀(이순겸, 이순화, 이순형)를 두었다. 아들 혜원은 미국 유학을 거쳐 아버지의 뒤를 따라 목사가 되었으며 Donna Rae Han(한국이름 혜순)과 결혼하여 1남(한영선, David youngsun Han) 1녀( 한영애, Bedany youngae Han)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