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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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당 조만식

1883년에 태어난 조만식은 스물세 살 되던 해에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해
신학문과 기독교 교육을 받았다. 그는 넓은 세상을 경험해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일본 유학을 떠났고, 일본 유학 후 남강 이승훈의 권유로
오산학교에 몸담게 되었다. 그는 세 차례에 걸쳐 9년 동안 오산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장차 민족을 이끌어갈 인물을 키워내는 데 모든 정열을 쏟았다.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행동과 실천으로 가르침을 주면서 조만식은
민족의 참된 스승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19년에 조만식은 평양에서
3.1 운동을 주도했고 일제의 검거를 피해 상해로 향하다가 체포되어
1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그는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 아래 일제의
경제적 착취에서 벗어나 자립하기 위해 조선물산장려운동을 펼쳤다.

또한 평양 YMCA 초대총무직을 맡아 다양한 민족운동과 경제, 문화 사업을 전개했다. 이 무렵 그는 산정현교회에서 오윤선,
김동원과 함께 평양의 3장로로서 일제의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강요에 철저히 저항하며 신앙의 지조를 지켰다. 조만식은 순수민간자본에
의한 유일한 실업학교인 숭인상업학교를 세웠고 신간회 중앙위원 겸
평양지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관서체육회 회장으로서 체육을 통해
민족의 단결력과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1932년에는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어려운 형편에 처한 민족언론을 살리는 데 힘썼다.
광복 이후 조만식은 민심 수습과 건국 준비를 위해 평남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소련군은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이
같은 수로 구성된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조만식이
북한지역에서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음을 간파해 그를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조만식은 민족주의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세웠다.

1970년에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조만식에게 추서되었고,
1991년 11월 5일, 부인 전선애 여사가 45년간 간직해 온
고당의 머리카락이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 안장되었다

관련 홈페이지

고당 조만식 기념사업회 http://www.godang.kr

한경직과 조만식

조만식은 오산학교에 부임한 지 2년 후에 교장으로 취임했고 한경직은
조만식이 교장에 취임한 다음 해에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조만식은
교장인 동시에 사감이요, 교목으로 일하였다. 그러나 월급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조만식은 늘 검소하고 무슨 일에나 학생들과 같이 하였다. 늦가을에는
학생들과 함께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직접 높은 산에 오르기도 했다고
한다. 오산학교에서는 매일 아침마다 기도회와 예배를 드렸는데 대부분
이승훈과 조만식이 인도하였다. 한경직은 그들의 열정적인 설교를 듣고
애국적인 삶을 체험하면서 자신이 지향해야 할 삶의 모델을 분명히
깨달았다. 월남 이후 한경직은 고당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일했고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면서 조만식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힘썼다.

“여러 선생님들에게 가르침을 받아 왔지만 고당 선생처럼 학생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실제로 모범을 보여 주며 그 전 생애를 희생한
교육가는 오직 한 분이었다고 기억됩니다. 그래서 특별히 그분을 존경하게 되었지요”
-「한경직 목사」, 김병희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