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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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사상

교육 사상

민족을 위한 기독교 교육

한경직은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길이 기독교 교육에 있다고 보았다.

곧 나라를 살리려면 사람들이 애국정신, 현대교육, 예수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라를 바로 세우는 것도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잘 가르치면, 즉 참다운 기독교 정신에 의해 교육시키면 그들이 나라와 사회를 바르게 이끌어 가리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오산학교 시절에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신앙교육과 학교교육의 연계

한경직은 영락교회 3대 목표 가운데 하나를 교육으로 정했고, 교회 건물을 지을 때 본당 다음으로 교육관을 지었다.

그는 교회와 교육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확고부동한 원칙 아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회교육이 교회의 참 모습이며 사명임을 강하게 역설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교회가 학교를 세우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교회 교육의 범주는 단지 주일학교에 머무르지 않고 학원선교와 학교교육으로 연결되었다.
이를 통해 한국 기독교계에서 교육신학의 실천자요, 교육신학적 목회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의 교육이념

그가 세운 많은 학교의 교훈이 '경천애인' 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사람을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나라를 사랑하게 된다'는 한경직의 교육사상이 담겨 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재들을 학교교육을 통해 키우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대한민국이 건전한 민주주의 국가를 이루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자랑스러운 나라가 되기를 소망했다.

교육 활동

교육 활동

교회 교육

한경직은 영락교회를 시작하면서 곧바로 주일학교를 시작했다.
그는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했지만 그 범주를 넘어서 장년교육을 교회교육의 중요한 범주로 포함시켰다.

1954년 1월부터 주일학교 내에 장년부를 신설해 성경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는 체계적인 성인교육의 시작이었고, 그 당시 장년성경공부 참석자는 예배 참석자 수와 거의 대등할 만큼 높은 참여율을 보였으며 문맹퇴치에도 크게 공헌했다.
또한 대상의 특수성에 따라 초창기인 1946년에 농아부를 창설했고 신입부, 영어성경부, 성경반을 조직해 교육하였다.
한경직의 교회교육은 주일학교 울타리를 넘어 주간학교, 성경구락부, 기독교학교 설립으로 확장되었고 그는 이를 통해 전인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또한 지성과 감성, 신앙과 학문, 영성과 전문성을 통합시켜 온전한 교육을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한경직은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교회교육에서도 학부모 교육을 실시할 뿐만 아니라 학부모회, 학부모 모임을 조직해 교회교육과 가정교육이 연계되도록 했다.

사회 교육

한경직이 민족을 위해 일한 최초의 직업은 평양 남산모루교회에서 운영하는 영성소학교 교사였는데 40명의 학생들을 최선을 다해 가르치다가 평양 숭실대학에 입학하게 되면서 그 학교를 떠나게 된다.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한경직은 오산학교 시절 은사인 고당 조만식의 권유로 숭인상업학교에서 일하게 된다.
그 당시 숭인상업학교는 선교사들이 아닌 한국 교인들의 힘으로 세워진 유일한 학교로서 고당 조만식이 이사장이었다.
숭인상업학교는 기독교 학교로서 성경을 가르치고 매일 기도회를 갖는 등 온전한 기독교 교육을 펼치고 있었다.
한경직은 이 학교에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고 조회 시간에 설교를 하기도 했다.
이후 한경직은 숭실대학 교장이던 윤산온(G.S.McCune) 선교사의 권유로 모교인 숭실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고자 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한경직의 교원인가가 갑자기 취소되었다.
그의 정치적 견해가 일본인들과 다르기 때문에 교사로서 부적격자라는 것이었다.
또한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것을 문제 삼으며 숭실대학 교수 취임을 강력하게 반대해 결국 교육자로서의 꿈은 좌절되었다.

그 이후 한경직은 목회자의 길을 걸으면서 여러 기독교 학교를 세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 나라 발전에 기여할 인재를 양성하는데 헌신했다.
1947년 봄, 한경직은 생계로 고통 받던 실향민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이북신도대회’를 열면서 월남 청소년들의 교육문제를 본격화했고, 대광중고등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낮에 시장이나 공장에서 일하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청소년들은 여전히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1952년에 그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을 영락교회에 모아놓고 성경구락부를 시작하였다.
이 모임은 1959년에 영락중학교와 영락상업고등학교로 발전하였으며, 1981년에 영락고등학교도 설립되었다.
한경직은 학교를 세우는 일뿐 아니라 무너진 학교를 재건하는 데도 힘썼다.
1907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에 의해 세워졌다가 1946년에 공산당에 의해 폐교된 보성여학교는 1950년에 영락교회 부속 건물에서 보성여자중학교로 재건됐다.
1897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평양에 설립해 1938년에 일제에게 폐교된 숭실대학은 한경직을 비롯한 동문들의 노력으로 1953년에 다시 세워졌다.
그는 재건 초대 학장에 취임해 학교의 재건에 힘썼고 종합대학으로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밖에도 한경직은 통일을 준비하며 여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해 영락여자신학교를 설립했고, 서울여자대학교를 비롯해 장로회신학대학교,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이사장으로 일했다.
이와 같이 그가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것은 건전한 심성과 실력을 갖춘 기독교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이 나라가 온전한 민주국가에 도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한경직과 관련된 학교들

한경직과 관련된 학교들

대광중학교
대광고등학교
영락중학교
영락고등학교
영락의료과학고등학교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슝의여자대학
보성여자중학교
보성여자고등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
오산고등학교
숭실대학교
숭의여자고등학교
숭의여자중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