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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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가장 중요한 덕목, 화평

한경직은 평생 동안 화평과 협력을 추구했다. 그는 교회 안팎의 다양한
활동을 주도하면서 화평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고 사업을
추진하는 것보다 인화(人和)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다양성 속에서 조화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자신과 입장이
다른 이들도 열린 마음을 갖고 한 형제로 포용하고자 했다.

한경직은 해방 이후 일본인 평안북도 도지사가 찾아와서 치안을
유지해 줄 것을 부탁했을 때 기꺼이 승낙했다. 이는 그가 민족을
사랑했으나 닫힌 국수주의자가 아니었고 원수까지도 아우르는 넓은
사랑의 마음을 지녔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복음적 에큐메니칼 운동 지지

한경직은 교파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조화와 통일을 추구했다.

즉 한국교회 안에서 복음적인 에큐메니칼(연합과 일치)운동을
폭넓게 펴나갔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누구와도 손을 잡고
모두와 힘을 합쳤으며 그들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비록 교파는 다르지만 교파를 초월해서 온 교회가 다같이 당
면하는 일 즉 국가, 민족, 사회를 위한 봉사나 복음전파에 있어서
서로 협력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학을 통해 갖게 된 글로벌 사고

한경직은 해외에 나가 공부하는 것, 특히 미국 유
학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았던 1920년대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미국 유학을 통해 학문을 연마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민주
주의의 바탕 위에 세워진 정치, 경제, 문화 등을 직접 경험하며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한경직은 영어에 능통해졌고 여러 미국인 친구들과
사귀게 되었다. 이를 통해 귀국 이후에도 오랫동안 미국 교회 지도자,
정치 지도자들과 폭넓은 교류를 가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한경직은 자신이 가진 국제적인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한국전쟁
당시 미국에 전쟁의 실상을 알리고 구호를 요청하는 한편 국내에 여러
외국민간원조기관이 방문했을 때 그들과 연계해 적극적인 구호활동을 펼쳤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한경직은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온 유학생인
동시에 국내에 몇 안 되는 ‘영어에 가장 능통한 사람’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리하여 밥 피어스, 빌리 그래함이 국내에서 집회를 가졌을 때 한경직은 그들의
통역을 담당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 동시에 함께 사역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세계복음화를 향한 소망

한경직의 이러한 화평과 협력정신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교회와 연대해 선교활동을 펼치고, 세계복음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는 전 세계 모든 족속이 하나님의 자녀로 화합하고
기독교 복음 안에 하나 되기를 소원했다. 또한 한국기독교
100주년을 맞이해 '84선교대회 여의도 집회에서 설교한
내용대로 한국 교회가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전환하기
위해 세계복음화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민족복음화운동을 해외선교로 확대해 아시아,
제3세계, 그리고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세계를 무대로 한 활동

세계 복음화 운동

한경직은 한국 기독교의 대표로서 세계선교협의회, 세계복음화운동 등의
세계회의와 대회에 참석해 모임을 이끌었다.

그는 1950년대부터 이미 세계적인 복음주의자들과의
연대를 통하여 세계복음화운동을 펼쳐나갔다.

1950년 밥 피어스를 만나 전개한 전도운동을
시작으로 해외 여러 나라에서 전개된 전도운동에
참여했다. 밥 피어스, 빌리 그래함과 함께 인도한
세계복음화 전도집회는 그의 두드러진 활동 중의
하나였다. 특히 1966년 빌리 그래함과 함께 베를린
세계전도대회를 주최하여 수년간 사역했던 것은
세계선교사에서도 오래 기억될 일로 남아 있다.
특히 한경직은 은퇴 이후 영락교회라는 목회 무대를
확대해 한국교회, 나아가서 아시아와 세계로
확대하여 더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국제선교협의회, 재일 한인교회 연합전도대회,
재미한인교회 연합집회, 싱가폴 하가이 전도지도자훈련원 강연,
빌리 그래함과 함께한 대만과 홍콩 전도집회, 이란 기독교
교역자 세미나, 재미 한인교회 순회집회, 재림대망 전도대회
등에서 설교하고 강의하는 일에 주력했다.

해외 선교

한국전쟁의 폐허로부터 아직 복구가 끝나지 않았던
1954년에 교회가 외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비
일체를 부담하는 일은 경제적 측면에서 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한경직은 영락교회를 통해 최찬영 목사 가정을
태국 선교사로 파송했다. 이것은 해방 후 교회가 해외에
선교사 가정을 파송한 첫 번째 사례이자 한경직이 얼마나
해외선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관심이 많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세계선교에 대한 비전이 없는 교회는
스스로 부패하고 망하게 되므로 교회는
내향적인 교회가 아니라 외향적인 교회가
되어 아시아, 제3세계, 전 세계의 넓은 밭에
나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영락교회는
태국선교를 시작으로 하여 2010년 현재
14개국에 21명의 선교사를 파송해 세계
곳곳에서 선교활동에 힘쓰고 있다.
한경직은 영락교회뿐 아니라 대한예수
교장로회 총회에서 1954년부터
1972년까지 해외선교위원회 대표를
맡아 주도적으로 해외선교를 추진했다. 또한
그는 아시아태평양전도대회 이후에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앞장서서 아시아 복음화를 위한 교회지도자를
양성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목사수양회 개최

1953년 8월 당시 부산에는 전국에서 피난길에 나선
400여 명의 목사들이 모여 있었다.
한경직은 밥 피어스에게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교회와 집을 잃고, 심령이 침체되어 있는데 이들이
은혜를 받아야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다고 역설함으로써
목사수양회를 처음으로 개최했다. 강사는 밥 피어스였고
한경직이 통역을 담당했다. 이 수양회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7회에 걸쳐 개최되었다.
이 행사는 고난의 순간에 위로와 물심양면의 도움을
줌으로써 동서양의 기독교가 맥을 같이한 것, 교파의
경계를 넘어 함께 만나 친교한 것, 그 결과 절망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통해 희망을 전달하게 된 것 등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목사수양회의 큰 영향력을 깨달은 한경직과 밥
피어스는 목사수양회의 세계화를 서둘렀다.

극동에서의 복음주의 세력의 통일이라는 면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를 통한 사회 구호의 메시지 전달에서 그 원초적 힘을
규합하고 계발하려면 이러한 통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한국에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목사수양회는 월드비전의 핵심 사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1995년경에는 전 세계 59개국에서 250여 곳의
목사수양회를 후원하고 개최하여 11만여 명의 교역자들이
참여하는 범세계적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에큐메니칼(연합과 일치) 운동

한경직의 신학은 분명히 보수적이고 복음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교회관은 복음주의적이면서도 에큐메니칼적이었다.
그는 에큐메니칼 정신의 핵심을 기독교적 사업에 있어서
교파 간에 서로 협동하는 운동으로 간주했다.

한경직은 민족복음화와 해외 선교를 더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와 연대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에큐메니칼 운동과도 손을 잡고 WCC (세계교회협의회)
대회에 참석했으며 동시에 복음주의 연합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신앙은 보수적이었지만 신학은 열어 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전 세계의 모든 교회와 신학자들과
대화할 수 있었고 온건한 복음주의적인
에큐메니칼 목회자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