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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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피어스

밥 피어스는 한국 고아의
아버지, 세계적인 대부흥사,
제트기처럼 날아다니는
성직자, 온 세계의 불행에
대한 동정심을 지닌
선교전략가, 가장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의 한 사람,
한국 어린이와 교회의
영원한 벗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교단이나 기관에서
파송 받지 않은 독립
선교사로서 월드비전을
세우고 복음을 전한
전도자였으며, 한국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고통 받는 인류를 위해 일했다.
그러나 밥 피어스는 해방
후 한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선교사였다.

그는 파세데나 대학을 다니던 중 목사의 딸인 로레인과 결혼했고,
복음전도자의 소명을 크게 느껴 학교를 그만두고
순회설교가로 활동했다. 1940년에 침례교에서 목사 안수
받고 캘리포니아 웰링턴의 제일 침례교회에서 잠시 목회했고,
1944년에 십대선교회 창설에 참여해 부총재를 역임했다.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그는 1949년에 김치선
목사가 시무하는 남대문교회 부흥집회 강사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1950년 봄에 서울, 부산, 대구 등에서 대대적인 전도집회를
가졌다. 그가 한국을 떠난 지 두 달 후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자신이
전도해서 예수 믿기로 한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죽게 된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리하여 종군기자 자격으로 10월에 한국을
찾았다. 군인이 아닌 목사의 신분 때문에 한국으로 오는 길이
막히자 자신이 운영하던 〈크리스찬 다이제스트(Christian Digest)〉
잡지사의 종군기자로 자원한 것이다.

그는 전쟁이 휩쓸고 간 한국의 처참한 실상을 목격했고 폐허 속에서 절망하는 한국인들을 위해 선교사업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사업을 펼쳤다.
특별히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이들을 위해 선명회(현 월드비전)를 조직하고,
미국에서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해 한국의 전쟁고아와 전쟁미망인들을 위한
지원 사업에 힘썼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밥 피어스는 한국정부에서
수여하는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한경직과 밥피어스

한경직은 옥호열의 소개로 1950년 봄에 중국을 거쳐 한국에
온 순회전도자 밥 피어스를 처음 만났다. 그 후 밥 피어스는
한경직의 초청으로 영락교회에서 설교했는데, 한경직은
그의 설교에 압도되었다. 그리하여 6.25 전쟁 직전에 당시
남대문 옆 공터를 빌려 초교파적인 연합전도대회를 열 수 있도록
주선했다. 밥 피어스의 설교와 한경직의 통역으로 이루어진 이
집회를 통해 둘은 매우 가까워졌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밥 피어스와 한경직은 부산에서 다시 만났다.
이때 밥 피어스는 400여 명의 목사들을 위한 구국기도회를 후원하였고,
부산 다비다모자원 설립에도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 후 밥 피어스와
한경직은 선명회(현 월드비전)를 세워 신앙부흥운동, 목회자수양회 등의
전도사역과 전쟁 고아와 전쟁 미망인을 위한 구호, 전쟁포로 전도, 한센병
퇴치, 농아와 맹아를 위한 구호와 의수족 사업 등의 구호사역을 함께 펼쳐 나갔다.
또한 밥 피어스는 한경직이 세계적인 복음전도자로서 다양한
일을 하도록 활동무대를 넓혀 주었다. 한경직은

“피어스(Pierce)
박사하고 늘 같이 다녔지요. 그분은 지금 세상 떠났지만 여러
군데 다녔지요.

몇 나라 못 가고는 다 갔지요"라고 회상했다.
한경직이 1951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밥 피어스는 한경직에게
빌리 그래함을 소개해 주었다. 이를 통해 한경직은 빌리 그래함과
전도사역의 중요한 동역자가 될 수 있었다.

밥 피어스와 한경직은 평생 동안 크고
작은 일을 의논하는 친구로 지냈으며
한경직은

“해방 이후 한국을 도와준
외국인이 참 많지만 그중에서도 밥 피어스는
실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 참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가장 먼저 한국의 불우한
피난민과 고아들을 돕고 복음을 전한 은인”

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