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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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량 선교사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1901년에 한국에 온 방위량은
평양 안주에서 40여 년 동안 교회를 순회 목회하면서
전도사업에 힘썼다. 특별히 그는 1907년에 일어난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이었다. 그는 장대현교회에서
1월 2일부터 22일까지 이길함(Graham Lee), 길선주
장로 등과 함께 말씀을 전하며 한국 교회에 회개와
부흥의 불씨가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평양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 그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진흥부 부장으로 있으면서
집회와 심방 등 교회 진흥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연구해
1920년대의 진흥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주역이 되었으며 1942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당했다.

1948년에 출간된 그 의 저서[Gold in Korea]에는 러일전쟁,을사조약,
국권피탈 등 구한말의 시대적 정황을
비롯하여 문명에 눈뜨는
한국인의 모습과 신앙생활이 선교사의 시각에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한경직과 방위량

한경직과 방위량의 만남은 어린 시절 그가 다니던 자작교회에서
이뤄졌다. 또한 한경직이 숭실대학에 재학할 때 방위량의 비서로
일했다. 방위량이 자신의 연구를 영어로 작성하면 한경직은 이를
한국말로 번역하고 인쇄하여 전국 교회에 배포했다. 한경직은
방위량과 지내면서 영어와 서양 풍속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고
그 경험은 미국 유학 시절 동안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방위량을
통해 교회 여러 지도자들과 만나고 교회 행정 업무를 익힌 경험은
훗날 한경직이 교회를 이끌어 가는 데 좋은 준비과정이 되었다.
방위량 선교사 슬하에는 딸 셋과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한경직은
은퇴 후에도 이들과 교류하며 가족처럼 가깝게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