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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Q

한경직에 대한 재미있는 궁금증을 모아서 그 해답을 알려드립니다.

한경직의 호적상 이름은 볕 경(景)에 벼슬 직(職)을 써서 ‘경직’이었습니다. ‘직’자가 항렬이었고, 세상에 빛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경직의 어렸을 때 이름은 ‘장수’였습니다. 장수라는 이름은 그의 아버지가 꾼 꿈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한경직의 아버지는 한겨울(음력 12월 29일)에 새벽녘 산통으로 괴로워하는 어머니를 지켜 보다가 잠깐 졸면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아기를 낳았는데 가만히 보니 아기가 아니라 범 새끼여서 놀라서 ‘아기를 낳은 게 아니라 범을 낳았구먼’ 하고 생각했는데, 범을 쓰다듬으니 아주 순하게 가만히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범의 새끼지만 참 순하구나!” 하고 말하는 순간 잠에서 깨어 주위를 돌아보니 날이 훤히 밝았고 아이도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한경직의 아버지는 그 꿈을 생각하면서 ‘범 같은 장수’라는 말도 있는데 다음에 커서 장수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장수’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한경직이 중학교를 다닐 때 담임 선생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직아, 네가 있으면 주위가 따스해지는구나. 어린아이가 이토록 많은 사람에게 따스함을 전하다니…… 그래, 넌 마치 서늘함이 느껴지는 가을녘, 그 가운데 따스하게 비추는 가을햇볕 같은 아이다.” 그러면서 소년 경직에게 가을 추(秋), 햇볕 양(陽)을 써서 ‘추양’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단법인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를 설립하면서 호가 필요하자, 한경직이 직접 들려준 것입니다.

오산학교의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 한경직이 재학할 당시 교장이었던 고당 조만식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애국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깊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경직은 3년 동안 오산학교에 다니면서 이들에게 철저한 애국애족 정신과 함께 투철한 기독교 신앙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예수 사랑의 마음으로 나라를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고 이는 한경직의 평생에 큰 깨우침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한경직은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을 인생의 큰 스승으로 삼아 남한으로 월남한 이후에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초대 이사장을 맡았고, 남강문화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옛 은사들의 업적을 기렸습니다.

한경직은 숭실대학교를 다니면서 오전에 공부하고, 오후에 방위량의 비서로 활동하는 한편 틈나는 대로 여러 가지 과외활동에 참여했습니다. 특별히 숭실대학교 YMCA 운동에 참가해 부장과 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또 여름에는 평원군 내에서 외지에서 유학하는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평원학우회를 조직해 계몽 강연 등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교내, 교외에서 웅변대회가 자주 열렸습니다. 한경직은 교내 웅변대회, 평양성 기독청년 웅변대회, 서울에서 열린 YMCA 웅변대회에 참가했습니다.

한경직은 이미 오산학교 시절부터 주일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전도대를 조직해 전도활동을 펼쳤고 숭실대학교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하며 그룹의 리더로 활동했기에 웅변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또한 좋은 성적을 얻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경직은 미국 유학 여비를 마련할 형편이 못 되어 고민하다가 자신의 은사인 남강 이승훈을 찾아갔습니다. 사정을 들은 남강 이승훈은 두 통의 편지를 써 주면서 “서울에 살고 있는 김성수와 윤치호를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한경직은 김성수를 먼저 찾아갔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다음으로 윤치호 를 찾아갔습니다. 

윤치호는 남감리교회를 세우고 105인 사건 때 투옥되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한경직이 윤치호를 찾아가 편지를 전달했더니 “미국에 유학을 가기로 했다구요? 나도 미국에 유학한 일이 있습니다. 참으로 잘 생각했습니다” 하면서 100원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당시 100원은 아주 큰 돈이었습니다. 한경직이 너무나 감사해서 앞으로 갚겠다고 하자 윤치호는 “공부가 끝나면 꼭 한국으로 돌아와서 조국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이 돈은 나한테 갚을 필요가 없습니다. 꼭 갚기를 원한다면 이 다음에 다른 사람들한테 갚으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당시 일본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3등선 배 값이 정확히 100원이었습니다. 한경직은 윤치호에게 받은 돈으로 태평양을 건넜던 것입니다.

한경직은 처음 만난 자신에게 선뜻 100원을 건네주었던 윤치호의 사랑에 감사하며 평생 동안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그 후 한경직은 1970년대초에 100만 원을 가지고 윤치호의 아들 윤영선(당시 농림부 장관)을 찾아가 아버지에게 받은 사랑의 빚 100원을 갚았습니다. 받기를 사양하는 윤영선에게 한경직은 이 돈을 받아서 좋은 일에 쓰라고 하면서 겨우 전해 주고 왔다고 합니다.

한경직이 신의주 제2교회를 이끌고 있을 때 복순(김복순)이라는 아이를 만나게 됩니다. 8-9세 된 복순이는 기차에 치여 다리 하나를 잃은 지체장애인이었고, 폐병에 걸린 아버지와 단둘이 쓰러질 듯한 오막살이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복순이의 어머니는 남편의 병이 깊어지자 복순이의 동생인 어린 아기 하나만 업고 집을 나가서 복순이가 집안 살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경직은 처음에는 교회 장로들과 의논해서 먹을 것, 입을 것, 그리고 거처할 곳을 제공하고 의사를 보내서 폐병에 걸린 아버지를 치료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봄에 복순이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교회에 다니시는 분이 복순이를 맡아 돌봐주었는데 그분의 자녀들과 마찰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경직은 고민하다가 신의주와 안동현 일대에 복순이와 같은 고아들이 많으니 집을 하나 마련해서 고아원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보린원을 세우게 되었고 복순이는 보린원의 첫 번째 원생이 되었습니다.

한경직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된 후에 평안북도 도지사였던 일본인의 요청으로 그들이 보복을 당하지 않고 귀국할 수 있도록 치안을 유지하는 일에 잠시 관여했습니다. 또한 그해 9월에 신의주제일교회 윤하영 목사 등과 함께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해서 정치활동을 펼쳤습니다. 이로써 그는 대표적인 기독교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 지도자로서의 지도력을 갖게 됩니다.

한경직에 의하면 “정당을 조직한 것은 정치적 야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꼭 해야 할 일인데 할 사람은 없으니 우리라도 손을 대야 한다는 ‘애국일념’ 하에 새나라의 건국의 기틀은 반드시 민주적이고 기독교적인 터 위에 놓아야 한다는 소박한 생각뿐이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신념(기독교와 민주주의사상)과 활동은 북한에 진주하기 시작한 소련군과 더불어 주도권을 잡게 된 공산당의 사상(유물사상)과 대립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탄압과 박해를 받게 되었고 이를 피해 남한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한경직이 1945년 12월 2일에 세운 베다니전도교회는 1946년 11월 12일에 영락교회로 이름을 바꿉니다. 교회 이름을 ‘영락(永樂)’으로 정한 데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 당시 교회가 위치한 지역이름이 ‘영락정(永樂町)’이었습니다.

둘째로, ‘영락’은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 가운데 가장 넓고 큰 나라를 건설했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연호였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고구려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는 이북 피난민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교회 이름으로 매우 적합했습니다.

셋째로, ‘영락’이란 말은 ‘영원한 복락’의 준말로 천국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재산을 모두 잃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기쁨은 잃지 않았다”는 신앙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0년 후반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는 9년 연속 풍작으로 1,100만 섬의 쌀이 남아돌기 시작했고 이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만 정부 재정 4,000억 원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쌀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쌀 먹걸리, 쌀 소주, 쌀 술 등의 소비를 부추기게 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WHO(세계보건기구)에서는 매일 4만 명의 아동들이 굶주림으로 죽어 간다는 보고서를 내놓았습니다.

그 당시는 남북이 전혀 교류하지 않았고, 적대적으로 대치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한경직은 한 형제이자 같은 동포이면서 굶어 죽어 가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살리자는 뜻에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주창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비록 북한 공산당의 심한 박해를 경험했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화해를 이루고,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고자 하는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는 의미에서 이 운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은 50여 개 기관단체가 연합한 폭넓은 사회적 연합운동이었습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 천주교 등도 크게 호응했고 해외 교민들, 외국 기업까지 동참했습니다.

1990년 7월에 남포항을 통해 쌀 1만 가마가 북한 동포들에게 전달됨으로써 분단 이후 첫 남북 민간 교역의 문을 열었고, 이는 굳게 닫힌 북한의 빗장을 여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2009년 보고자료에 의하면 총 88억 8천만 윈의 모금을 거두어 북한에 11억, 몽골을 비롯한 20여 개 나라에 40억, 그리고 국내에 38억 상당의 사랑의 쌀을 나누어 왔습니다.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은 국민의식을 계몽하고 국위를 선양하며 사랑의 실천, 믿음의 봉사로 국민적 화합에 기여하는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1990년에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본부’가 조직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오면서 여러 곳에 사랑의 쌀이 전달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모여진 쌀들은 먼저 남한의 소년소녀 가장이나 의지할 곳 없는 독거노인, 영세민, 장애인, 사회복지단체에 전달되고 있고 긴급 이재민이 발생할 때마다 구호 지원용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둘째로, 북한의 굶주리는 동포들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한경직은 남한은 쌀이 남아돌고 있으나 북한은 쌀이 없어 굶어 죽어 가는 현실에 마음 아파하며 남북 간에 전혀 교류가 없고 적대적으로 대치하고 있던 1990년대부터 북한 동포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셋째로, 사랑의 쌀은 몽골, 방글라데시, 베트남, 사할린, 소말리아, 수단, 에디오피아, 캄보디아, 필리핀 등 지구촌 곳곳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사랑의 쌀은 동포애와 인류애를 전하는 귀한 도구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한경직은 1945년 12월에 27명의 성도들과 함께 영락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자유를 찾아 집과 가족을 떠나 남한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중심을 이룬 교회였지만 영락교회는 1년도 안 되어 두 군데에 개척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는 개척교회가 동시에 개척교회를 세운 최초의 일로 한국교회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한경직은 영락교회 교인들과 힘을 합쳐 전국 곳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해방 이후 서울지역 장로교회 신앙 유형 연구> (이병수 박사 논문)에 따르면 한경직은 그가 영락교회를 이끄는 동안 626개 교회를 개척하거나 재정적인 지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템플턴상 심사위원회는 한경직에게 이 상을 주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서울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인 영락교회를 세웠으며, 피난민과 가난한 사람을 위해 봉사하며 한국 기독교의 눈부신 성장을 이끌었다. 한 목사는 20세기가 낳은 한국의 가장 뛰어난 목사이다. 그는 한국에 많은 교회가 서도록 했을 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기카, 유럽 그리고 미주 지역에 해외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선교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여러 교육 기관을 사회봉사 기관을 설립하여 교육자로서 또 사회 봉사자로서 사회 복지에 기여하였으며 나라가 위험할 때는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사회의 갈 길을 제시하였다.”

한경직에게는 북한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아직 고향땅을 밟아 보지 못한 실향민이 많기 때문에 나만 먼저 가지 않겠다”라고 하며 사양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우리나라의 통일을 위해 기도했고 북한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생각하며 자주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한경직의 청빈한 생활은 신의주 시절부터 유명합니다. 그는 교회에서 월급을 받으면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둑으로 가서 생활이 어려워 옷을 입지 못하고 먹지 못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 사실이 드러나자 교회에서는 그의 아내에게 월급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여름 옷 두 벌, 겨울 옷 두 벌로 생활했고, 자기 이름으로 된 통장, 집, 땅을 갖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와서 값비싸고 좋은 선물을 주고 가면 그는 그것을 그대로 두었다가 가난한 신학생이나 교회 직원, 구걸하는 걸인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한경직이 템플턴상을 받으러 베를린에 갈 때 입고 갈 변변한 양복이 없자 이를 알게 된 어느 분이 출국 직전에 급하게 양복을 마련해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템플턴상과 함께 받은 102만 달러(한국 돈으로 약 8억 원) 전부를 북한선교와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에 쓰도록 영락교회에 맡겼습니다.

영락교회를 이끌던 시절에 한경직은 미국 출장을 다녀오면 남은 여비는 꼭 교회에 반납했고 은퇴한 후에 남한산성 숙소에서 생활할 때도 교회에서 보내오는 사례비 가운데 3분의 1 정도만 쓰고 나머지는 교회에 되돌려 보내라고 했습니다.

한경직은 1973년에 은퇴한 후에 서울에 있는 좋은 집을 거절하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 영락여자신학교의 18평짜리 숙소를 거처로 삼았습니다. 그가 남긴 유품들은 하나 같이 소박하고 낡고 오래된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사람들이 그에게 ‘아름다운 빈손’이라는 별명을 지어 줄 정도로 그는 예수님을 닮은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한경직은 음력 1902년 12월 29일(양력 1903년 1월 27일)에 태어나 2000년 4월 19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98세까지 산 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고 미국 유학시절 폐결핵 2기 진단을 받고 2년 6개월 동안 요양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신의주 제2교회를 이끌 때에는 1년에 한두 달씩 공기 좋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쉬기도 했습니다. 또한 영락교회를 이끌면서 매일 점심식사를 마치고 난 후에 조금씩 낮잠을 자야 할 정도로 몸이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활발하고 왕성한 활동을 했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국내 구석구석뿐만 아니라 해외 어디든지 달려갔습니다.

그는 영락교회를 은퇴하면서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래 살 줄 몰랐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왔습니다”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그는 100년 가까운 오랜 세월 동안 장수할 수 있었습니다.